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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드림

[사요히나]별의 다이어리-16

W.여름 꽃

 

 

오래간만의 장시간의 여행은 뱀파이어인 사요라도 피곤이 몰려왔다. 당주가 된 게 뭐가 자랑이라고 이렇게 온 지하를 누비며 인사를 하러 다녀야 하는 건지. 묘하게 더 진해진 청녹색의 눈동자가 그간 몰려온 피곤에 힘겨운 듯 느리게 깜박거렸다.

 

 

 

한 때 히카와 가문을 소란스럽게 했던 사요의 가출 사건이후 어언, 20년이 흘렀다.

 

 

 

채 일주일도 못 채우고 돌아온 집안에서는 멍청한 hope년 하나가 장녀를 홀린 거라고 아이를 욕하며 사요를 옹호하기가 바빴지만, 그나마 정상적인 자신의 친구들은 그저 혀를 차며 얼른 다시 돌아가라며 사요를 나무라기 바빴었다.

 

 

 

“..피곤해.”

 

 

 

아직도 21세기인 현세를 따라잡지 못 하듯 말이 모는 마차 안에서 붉은 빛의 와인이 절반 쯤 담겨 있는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요가 이내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내뱉은 말이었다.

 

 

 

상큼해 보이는 색상과는 다르게 독하면서도 쓴 맛이 입 안 가득 휘몰아치며 옅은 알코올의 뜨거움이 목가를 간지럽혔다.

 

 

 

10년 전.

 

 

아버지를 죽였다.

 

어머니를 죽이고.

 

어머니께서 새로 만들어 주신 hope도 죽여 버렸다.

 

 

그리고,

 

 

아이를 찾기 시작했다.

 

 

 

히나-”

 

 

 

꽁꽁 숨어버린 너를 찾는 게 이렇게 힘든 거였다면 그때 놓치지 않는 거였는데.

 

 

 

10년 전 네 향기를 듬뿍 묻혀 돌아온 기사 한 명을 본 순간 이성을 잃었던 내가 정신을 차리자 남아 있었던 건 달달한 네 향기와 동시에 달큰한 피가 가득 묻어있던 기사의 시체 한 구였다. 이미 반쯤 죽어있던 아버지란 존재는 내게 문외한 이었지만.

 

 

 

꿈틀꿈틀 이제 막 죽음을 맞이한 몸뚱아리는 떨어진 팔도 마찬가지였는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죽이지도 못했으면서, 놓치기까지 했으면. 그냥 아이처럼 도망쳐 버리던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몰골로 내게 돌아왔던 것이었던 걸까. 찾을 수 없었음에도 살아 있는 아이의 존재를 느끼듯 꿈틀거리며 뛰어대는 심장에 고통으로 울부짖었던 그때를 다시금 생각하던 사요는 푸른 지하 세계 사이로 보이는 인공적인 달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이내 눈을 감았다.

 

 

 

저택으로 돌아가면 아이를 다시 찾을 것이다.

 

 

 

이 내가. 내 손으로. 내 눈으로. 다시

 

 

 

상처하나 입히지 않은 멀쩡한 몰골의 아이를 찾아낼 거다.

 

 

 

새하얀 피부와 밝은 머리색. 슬쩍 눈치를 보면서도 저를 졸졸 쫒아 다니던 아이를. 내가 미치기 전에 찾아야 했다.

 

 

 

아무리 인내심이 긴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20년이 넘으니 미쳐버릴 것 같았다.

 

 

 

 

-

 

 

 

 

콜록콜록

 

 

 

먼지 가득한 폐 저택에 숨어 있던 히나는 결국 참다 못 해 콜록콜록 기침을 내뱉었다. 조용히 숨어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건지 묘하게 끌리는 달달한 향기를 쫒다가 그만 늑대인간들을 만난 게 문제였다.

 

 

 

뱀파이어와 척을 지고 있는 늑대인간을 그때 하필 마주친 것도 문제였지만, 더 중요한 것을 말해보자면, 흡혈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었던 신생 히나와 마주친 건 늑대인간의 우두머리였다.

 

 

 

히나의 창백한 피부와 묘하게 느껴지는 특유의 뱀파이어의 분위기에 이빨을 보이며 늑대로 변신한 우두머리는 히나의 목을 물고는 공놀이를 하듯 물어뜯다가 멀리 내팽게 치고는 다시 달려 들었더랜다.

 

 

 

그런 우두머리의 모습에 겁을 집어먹은 히나는 고통에 괴로워할 새도 없이 힘껏 도망을 쳐 근처에 있던 폐 저택에 숨어들었고, 그나마 안전하다고 느껴진 3층 중간에 위치한 장롱 속에 숨어들고서는 숨을 참은 것도 몇 십분 전.

 

 

 

언젠간 고블린들이 쌓아놓은 책들 중 늑대인간에 관련된 책에서는 늑대인간의 우두머리는 다른 늑대들보다는 더 진하고 깊은 노란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고 했었다.

 

 

 

그러니..

 

 

히나를 물어뜯은 그 늑대인간은 필히 우두머리가 분명했을 터였다. 눈동자 색이 책에서만 보아왔던 호박버섯처럼 노랗고 진했으니까.

 

늑대인간의 우두머리는 뱀파이어보다 몇 십 배나 후각이 발달했고, 힘이 강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런 우두머리가 히나 자신을 찾고 있었다.

 

 

사실.

 

 

냄새만으로는 한 참 전에 찾았겠지만.

 

 

더 겁을 줄 생각인지 히나가 나타나기 전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 우두머리의 모습에 콜록 기침을 내뱉다 화들짝 놀란 히나는 결국 체념하듯 눈을 감아버렸다.

 

기침을 격하게 내뱉던 히나의 목소리에도 인기척 하나 내지 않는 걸 보면. 분명 제 발로 나오라는 거겠지.

 

 

신사는 아니지만 신사답게 죽여주겠다. 이런 건가.

 

 

이미 인간이었다면 치사량에 도달했을 만큼 목가에서 흘러나온 피는 지혈될 생각도 없이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철철 흘러내려 장롱 밑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특유의 체향, , 그리고 기침소리.

 

 

이미 들킬 요인들이 넘쳐날 만큼 많았다.

 

 

그냥.

 

편하게 죽어버릴까.

 

20년의 도망침은 신생아인 히나에게 큰 힘겨움이었다.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것도 없었고, 아무도 없었다.

 

그랬기에 힘들고 외로웠던 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죽기 일보직전이었다.

 

 

 

“...”

 

 

 

결국 모든 걸 다 포기하자는 생각이 들고 나서야 닫혀 있던 장롱 문을 열며 훅-숨을 내쉬던 히나는 낡은 테이블 위에 걸터앉아 있는 인간 현상의 늑대 인간과 눈을 마주치고 나서야 저절로 숨이 멈춰졌다.

 

 

 

지는 태양의 그을림처럼 노란 눈동자.

 

 

매서움을 가득 담고 있는 차가운 눈동자가 굳어버린 히나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용케도 나왔네. 한 십분만 더 그대로 있었으면 장롱 채로 꽁꽁 묶어서 불로 태워버리려고 했는데..”

 

 

 

“...”

 

 

 

오랜만에 내 구역에 들어온 뱀파이어 길래 얼마나 강한 녀석인지 보려고 했더니 완전 잔챙이가 들어오지를 않나..덤빌 생각도 하지 않고 도망치기에 쫒아왔더니 허점만 가득 들어낸 채로 죽을 생각을 하지를 않나.”

 

 

 

“...”

 

 

 

너 도대체 뭐하는 녀석이니?”

 

 

 

“...”

 

 

 

?”

 

 

 

차가운 분위기에 어울리는 네이비 색 와이셔츠의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내뱉는 늑대인간의 말에 피가 흘러내리는 목덜미를 꾹 누르고 있던 히나가 장롱에서 바닥으로 발을 내딛었다.

 

 

 

“..가족이 없어요.”

 

 

“...”

 

 

 

체력에 한계가 온 건지 쇳소리 가득한 목소리가 나온다. 그와 덤으로 휘청거리는 몸은 힘이 없어 바닥에 고꾸라져 겨우겨우 팔로 지탱을 하고 있는 상태고. 그런 히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몸을 일으킨 늑대 인간은 히나의 언니인 사요와 더 자매인 듯 차가움이 닮아 있는 무뚝뚝한 눈동자로 히나를 바라보다 이내 애쉬색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히나에게 다가갔다.

 

 

 

친구도 없어요.”

 

 

 

흐음-?”

 

 

 

“20년 전부터 항상 혼자였어요.”

 

 

 

부들부들 떨려오는 몸을 힘겹게 지탱하는 팔과는 다르게 떨림 하나 없이 내뱉어지는 말들을 말하며 바닥을 흥건하게 채우고 있는 피를 바라보던 히나가 결국 눈을 감았다.

 

 

 

그래서?”

 

 

 

그냥, 죽기 전에 말하고 싶었어요.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없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웅덩이가 가득 고인 핏물 사이로 고개를 처박은 히나가 새액-느릿하게 숨을 내뱉었다.

 

 

 

비린 맛이 입 안 가득 들어와 비위가 상했다.

 

 

 

이게 무슨 맛이라고 뱀파이어들은 피에 환장을 하는 건지.

 

 

 

쿨럭.

 

 

 

다시금 나오는 기침을 내뱉으며 흐려지는 의식과 얼마 안 있어 몸을 일으키는 부드럽고도 뜨거운 손길을 느끼던 히나는 입 안 가득 들어오는 뜨거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어가는 걸 느끼며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